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문단 편집) === 첫 번째 임기 === 196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경선에서 패배한 후에 자유당에서 국민당으로 당소속을 바꾼 그는 1965년 대선에서 51.9%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대선 과정에서 마르코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자신의 항일투사의 이미지를 계속 홍보했는데, 당시 마르코스의 상대 후보들은 과거에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선거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경제발전과 정부개혁, 부정부패 척결을 외쳤다. 그리고 재임 초기에는 친미반공 일변도였던 필리핀의 외교노선을 바꾸어서 공산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고, 중소 경공업을 육성하면서 지방인프라 확충작업을 벌였는데 이 덕분에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서 빈곤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 보였다. 그는 수교를 맺으면서도 [[베트남]]에 [[필리핀군]]을 보내거나 필리핀 내의 공산반군을 때려잡는 행위는 계속 했다. 그러던 중 1966년 마르코스 대통령은 [[베트남 공화국|베트남]] 지원법을 통과시켰고, 연인원 10,000명 이상의 [[필리핀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비전투 활동에 참여하였다. 문제는 마르코스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입장 번복이었다. 필리핀 상원의장이었을 당시에 마르코스는 전임 대통령 마카파갈의 베트남 파병법에 반대하였고, 하원에서 통과된 지원법을 상원에서 지연함으로써 파병을 자연스럽게 폐기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런디 대통령에 당선되고서는 입 싹 씻고 파병에 찬성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이러한 태도 변화는 마르코스가 [[미국]]의 경제 지원 때문에 미국에 넘어갔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마르코스의 지지자들에게도 비난을 받았다. 어쨌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마닐라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1966년 [[미국]]을 방문했던 마르코스는 [[일본]]으로 가는 도중 "[[마닐라]]에서 아시아 정상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다"라고 발표했고, 이 정상회담의 목적은 "[[베트남]]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상황을 끝내고 베트남을 도우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이미 여러 곳에서 서술되었다시피 대한민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투병을 보낸 나라였기 때문에, 당연히 국정홍보용 기록영화인 [[대한뉴스]]에도 한 회분을 통째로 할애하다시피 하며 남겼다.[[https://youtu.be/ngpCpRAzfCM|#]] 한편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서 필리핀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뻔뻔스럽다", "대부분의 국가가 참여하지 않는다" 등으로 마르코스를 비판하였고, 이에 정상회담의 이름이 '마닐라 정상회담'으로 바뀌었다. 당시 반정상회담 시위에서 대학생들은 "양키 고 홈", "먼저 쏘고 나중에 대화하라 존슨", "헤이 존슨, 오늘은 몇 명이나 죽였나?" 등의 미국을 비판하는 구호나 "베트남: 핍박받는 자들의 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경찰들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과정에서 학생들은 신발을 잃고 피를 흘리기도 했다. 시위대는 그 과정에서 필리핀 국가인 [[Lupang Hinirang]]을 제창하고 대열을 유지한 채 경찰 앞에 섰지만, 결국 무자비한 진압 끝에 시위는 해산되었다. 이외에도 필리핀 전국에서 농민들이 경찰들에게 구타와 학살을 당했지만, 오히려 농민들을 학대한 관련 경찰관이 처벌받지 않고 승진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 비판을 받았다. 어쨌든 저런 것으로 말은 많았지만 상기했듯 1기 집권시에 경공업 수출은 호황이었던데다가 외채를 빌려서 9만여개에 달하는 학교 건물과 북로손 고속도로를 신축하는 등 각종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였고, 농업생산량 증가를 위해 신품종 도입에 나섰다. 필리핀의 볼도저 대통령인 셈이었다. 이에 따라 필리핀의 경제성장률이 급속히 올라가고 학교취학률도 급속히 올라가며 마르코스의 인기는 고공행진하였다. 이 때문에 1969년 대선 선거과정에서 군대와 관료조직을 활용해 매표행위를 벌이는 금권선거를 벌였음에도 1969년 대선에선 61.5%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면서 전후 최초의 재선 대통령이 되었고, 하원이 여소야대였던 1기 집권기와는 달리 상하원과 부통령직까지 국민당이 전부 차지했다.[* 재미있게도 박정희도 1971년 총선과 대선에서 선거를 염두에 두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새마을 운동을 통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작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물론 결과는 좀 달랐는데 마르코스는 초압승을 거두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확인한 반면에, 반면에 박정희는 대선에서 신승과 총선에서의 부진으로 체면을 구겼다는것이다. 다만 둘이 다른 길을 걷데 된것은 마르코스는 세수부족을 무작정 수출에 목을 매서 해결하려했던 반면에, 박정희는 부동산 장사로 충당하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